OUR TOWN

まちを知る

센리뉴타운이란

1.탄생

千里ニュータウン

살기 좋은 도시주거지를 만들기 위해

일본에서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많은 가옥이 소실되었고, 해외 식민지에 나가 있던 사람들도 패전 후 일본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에 더해 1955년경 시작된 급격한 고도성장・공업화로 일자리를 찾아서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좁은 집에서」「많은 식구가」 함께 살 수밖에 없었고, 사생활도 보장되지 않는 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가옥들의 무질서한 「교외로의 팽창」(스프롤현상)은 도시계획의 측면에서도 방치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사카부에서는 100만호 이상의 주택건설 방침을 결정. 이에 관한 중점시책으로서 저가이면서도 양질의 주택 및 택지를 공급하고 양호한 거주환경을 정비하기 위해 오사카부 북부 구릉지에 「센리뉴타운」을 건설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이는 일본 최초의 대규모 뉴타운(신도시) 구상이었습니다.

일본최초의대규모뉴타운구상

이 건설구상은 1956년부터 검토를 시작하여, 1958년 사업화가 결정. 당초 마스터플랜도 2,500ha규모의 개발사업으로 계획되었으나, 오사카부의 재정 상태를 고려하여서 1960년 최종안에서는 1,160ha규모의 개발사업으로 결정. 1961년 착공, 1962년 사타케다이에 최초의 주민 입주가 개시되었습니다. 뉴타운 개발을 위하여 법률도 새롭게 정비되었습니다.

소재지오사카부 스이타시・도요나카시
사업주체오사카부 기업국
계획인구1,160ha
개발면적15만명
주택건설계획37,330호
지구・주구스이타시 구역 2지구8주구, 도요나카시 구역 1지구 4주구
시역별 규모스이타시 구역 791ha 약 10만명, 도요나카시 구역 369ha 약 5만명

사진제공:오사카부

2.계획

근린주구이론에 기초한 계획도시

센리뉴타운에서는 일본 최초로 「마스터플랜」의 작성을 통해 「근린주구이론」에 입각하여 도로・철도・공원・학교・상점 등의 종합적・계획적 배치를 실현하였습니다. 이 점이 구시가지 형성과 크게 다른 점입니다. 계획 과정에서 전문가들의 지혜가 집약되고, 서구 뉴타운의 선진사례가 충분히 참고되었습니다.

MAP

【센리구릉주택지구 개발계획도】 출전: 大阪府 『千里ニュータウンの建設』

「지구」와「주구」

전체를 남, 북, 중앙의 세 지구로 나누고, 각 지구는 간선도로에 따라 「~다이」「신센리~마치」라고 명명된 12개 「주구(초등학교 학군)」로 세분하였으며, 근린센터나 공원 등을 각 주구마다 배치하였습니다. 각 주구는 60~100ha의 면적. 이러한 「근린주구이론」은 20세기 서구의 뉴타운 건설을 뒷받침한 이념의 하나로, 1920년대 미국의 페리(Clarence Perry)가 체계화한 것입니다.

다양한 주택의 혼합

다양한 사람들이 조화된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도록 단독주택, 집합주택(공공 임대주택: 공영/공사/공단(UR), 분양집합주택), 사택 등 모든 종류의 주택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주구의 중심에는 집합주택(아파트)을, 주변에는 단독주택을 배치하여 도시적 경관을 연출하고 더 많은 주민들이 단시간에 주요 시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습니다.

풍부한 녹지와 안전

전체면적 1,160ha 중 주택지는 약 42%. 이 중 단독주택과 집합주택은 거의 같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도로, 공원 등의 공공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였고, 특히 「공원・녹지」는 전체의 약 21%에 이릅니다.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뉴타운 전체를 주변녹지가 에워싸도록 하고, 지구마다 주구마다 공원을 두었습니다. 센리뉴타운의 풍부한 녹지는 그 이전에 건설된 주택 단지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건설된 뉴타운과 비교할 때에도 뚜렷한 특징이자 장점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주택의 혼합

출전:千里ニュータウン再生連絡協議会
『第1回千里ニュータウン再生のあり方検討委員会資料』

주민의 안전을 위해 보행자와 자동차의 동선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구릉지의 다채로운 지형을 이용하여 넓은 공지를 건물로 둘러싼 형태로 주택 단지를 만들고, 단지 곳곳의 진입로를 주머니 형상의 막다른 도로(cul-de-sac) 형태로 만든 「래드번(Radburn) 배치방식」이 설계에 채용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자동차의 불필요한 진입 및 통과가 제한되고, 주민들이 넓고 조용한 보행 공간을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千里ニュータウン写真

사진제공:오사카부

3.변화

빛나는 ‘센리의 성공’

센리뉴타운은 일본의 고도성장이 절정에 이른 1962~1970년 사이의 불과 8년만에 건설되었으며, 완성된 해인 1970년에는 근접지에서 “EXPO ‘70”이 개최의 영향으로 교통도 환경도 급속하게 정비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센리라는 이름은 ‘미래도시’라는 이미지를 수반하며 엄청난 유명세를 타고 빛나는 성공이라는 선례로서 만은 뉴타운들이 센리에서 배운 것들을 일본의 여기저기에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황족, 국내외 정치가, 행정관계 자 등 다수의 시찰자가 센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千里ニュータウン写真

뉴타운 특유의 족적

그러나 단기간에 모든 것이 만들어진 마을은 독특한 기적을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개발당시에는 비슷한 젊은 세대의 핵가족이 한꺼번에 입주하였기 때문에 곧이어 어린이가 급증하여 초등학교가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좁은 임대의 집합주택(단지)가 많았던 센리뉴타운에서는 줌인은 어린이의 성장과 함께 전출할 것이라고 예상되었지만, 많은 주민은 환경이 정비되어 편리한 ‘센리의 매력’에 빠져 집이 좁더라도 계속하여 살아가는 방향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특정세대많이 많은 ‘주민세대의 편중’은 그대로 계속되고, 아동들이 독립한 후에도 부도세대는 그대로 인채 머무르면서 1990년대에는 고령확각 급격하게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학교는 빈교실이 늑어나면서 모든 인프라가 동시에 노후화되어 ‘올드 타운’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대의 편중은 전국적으로 뉴타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후속의 뉴타운에서는 1970년대의 석유파동의 영향으로 건설이 슬로우 다운 된 결과, 입주한 세대의 연령이 균등화된 반면 센리 뉴타운에서는 석유파동 이전에 초기 입주가 끝났었기 때문에 세대의 편중이 현저하게 드러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주택

초기의 단독주택은 1980년대 후반 버블기 전후에 많은 주택이 재건축되었습니다. 집합주택(아파트)은 버블경제의 붕괴 이후 사택이 민간 맨션으로 전환되는 사례로부터 재건축이 시작되어 2005년 이후 분양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의 대규모 재건축이 급증하였습니다.

상업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로 대규모 쇼핑센터를 이용하게 되면서 근린센터의 주축을 이루던 점포들이 문을 닫고 빈 점포가 늘어나는 등 근린 상가의 공동화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사진제공:오사카부、奥居武(오쿠이 다게시)

4.재생

언제까지나 선두주자

센리뉴타운은 「일본 최초의 뉴타운」으로서 화려한 주목을 받은 반면, 저출산・고령화나 주택의 노후화 등 많은 사회문제를 먼저 경험하였으며, 재생을 위한 대책 마련도 일찍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부분적 재생은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지만, 지구센터의 활성화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어 그 작업이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부터. 아파트 재건축을 둘러싼 논의가 1990년대 시작되었지만, 특히 입주 개시 40주년을 앞둔 2000년 전후부터 아파트 재건축이 당면과제로 인식되어 스이타・도요나카시가 시민과의 협력을 통해 각종 구상 및 가이드라인을 순차적으로 정비하였습니다. 2007년에는 스이타시, 도요나카시, 오사카부, 독립행정법인 도시재생기구, 오사카부 주택공급공사, 재단법인 오사카부 타운관리재단이 연계하여 「센리뉴타운 재생지침」을 책정. 뉴타운다운 개방감과 좋은 입지조건을 살려 새로운 주민들의 유입을 유도하기위한 대책이 마련되었습니다. 그 결과 오래된 단지의 재건축이나 민간아파트의 건설이 진행되었고, 인구와 아동의 수가 미약하나마 증가세로 돌아섰습니다.

인구

뉴타운 건설당시 계획된 인구수는 15만명이었던 것에 대하여 실제로는 1975년에 약 13만명이었던 것을 정점으로 계속하여 인구가 감소하였고, 2005년 인구센서스에서는 9만 명을 밑돌게 되었습니다. 세대수는 1980년부터 2010년까지 큰변화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빈집 등이 증가한 것은 아니고 세대 중의 사람수가 감소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세대의 소형화는 전국적인 경향입니다).

2010년 이후에는 여러가지 재생정책의 효과가 나오기 시작하여 10년 인구는 10,000명 이상 증가하여 10만명을 다시 넘어서게 되었고, 세대수도 5,000세대가 증가하였습니다. 고령화율은 1990년경부터 급격히 상승하여 오사카부전체나 전국보다 고령화한 지역이 되었지만 이것도 역시 최근에는 재생정책으로 보합세를 띠게 되었고, 젋은 주민의 유입과 장기가 거주하고 있는 주민의 고령화가 병행하여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신인구통계는 ->여기로(https://senri-nt.com/ourtown/population)

출전:国勢調査、千里ニュータウン再生連絡協議会『第1回千里ニュータウン再生のあり方検討委員会資料』

더 나은 주거지로

센리뉴타운은 우수한 입지조건으로부터 조금씩 계속하여 변화하고 있습니다. 역앞의 지구센터에서는 처음 또는 두 번째의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근린센터의 빈 점포에는 커뮤니티 시설이나 생활지원 시설이 들어서, 「걸어 다니면서 생활할 수 있는 지역」의 중심으로서 새로운 역할이 기대되고 있습니다. 처음에 입주한 주민들의 고령화와 함께 자녀양육세대의 전입도 활발하며, 세대를 넘어선 상부상조가 지역의 테마가 되어 있습니다. 센리뉴타운은 지금도 '실험도시'이며 그 재생은 일본국내의 뉴타운이나 아시아를 필두로 해외의 뉴타운에도 많은 시사점을 부여하게 될 것입니다. '최초의 뉴타운'은 언제까지나 '최초의 뉴타운'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제공:오사카부、松浦弘昌(마쓰우라 히로마사)

연표

1958개발사업 결정
1960마스터플랜 결정
1961기공식
1962사타케다이 입주 개시(센리뉴타운 오픈)
1963다카노다이, 쓰쿠모다이 입주 개시
한큐전철 센리야마역~신센리야마역(현 미나미센리역) 구간 개통(센리뉴타운 최초의 철도)
1964후루에다이, 후지시로다이 입주 개시
1965아오야마다이 입주 개시, 남지구센터 전문상점가 오픈
1966신센리기타마치, 신센리히가시마치 입주 개시
1967신센리병원 개원
한큐전철 미나미센리역~기타센리역 개통(기타센리역에 세계 최초의 자동개찰기 설치)
북지구센터 전문상점가 오픈
모모야마다이, 다케미다이 입주 개시
1968신센리니시마치, 신센리미나미마치 입주 개시
오사카대학 스이타캠퍼스 이전 개시
1969인구 10만 명 돌파
1970일본만국박람회(오사카 엑스포)
기타오사카급행전철, 신미도스지 도로, 오사카중앙환상선 도로 등 개통
중앙지구센터 오픈
개발사업 완료
1971만국박람회 기념공원 오픈
1972세르시 오픈
(입주 개시 후 10년이 지나 단독주택 구역의 전매금지 해제)
1973오일 쇼크로 화장실 휴지 사재기 소동 발생, 센리에서 전국으로 파급
한큐전철 야마다역 개통
아동수 급증으로 마스터플랜에 없던 초등학교를 최초로 신설
맨션 붐으로 뉴타운 주변의 택지개발이 확산됨
1974(이 시기부터 주택 내 욕조 보급으로 근린센터의 목욕탕이 쇠퇴하기 시작함)
1975인구 128,993명으로 정점에 이름
1977국립순환기병센터 개설
만국박람회 기념공원 내에 국립민족학박물관 개설
1978부영주택 일부의 증축이 시작됨
(이 시기부터 도서관, 공민관, 체육관 등이 순차적으로 오픈)
1982센리구릉지의 죽림이 일본의 자연 100선에 선정됨
1990쇼핑센터 센추파르 리뉴얼 오픈
오사카 모노레일 센리추오역~미나미이바라키역 구간 개통
1991쇼핑센터 센추파르 그랜드 오픈
(이 시기부터 사택이 맨션으로 전환되고, 단지의 재건축이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함)
1993오사카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이 센리로 이전
1994쇼핑센터 디오스기타센리 그랜드 오픈
1997아자르 모모야마다이 빌딩 오픈
인구 10만 명 미만으로 감소함
2002센린뉴타운 시민 공개 토론회
2004쇼핑센터 가든몰 미나리센리 오픈
200565세 이상 인구의 고령화율이 25%를 돌파
2006센린뉴타운(스이타 시립 박물관)
2007센린뉴타운 재생지침 제정
인구 89,212명으로 최소에 이름
2008도요나카시 센리문화센터 「코라보」오픈
2011센리중앙지구센터 정비 완료
2012스이타시 센리뉴타운플라자(센리뉴타운정보관) 오픈
센리뉴타운 오픈 50주년、센리촛불로드 시작
2015센리토 요미우리 오픈
2017작렬! 워터배틀 시작
센추파르잔디나이트극장 시작
2018센린뉴타운 재생지침2018 제정
오사카북부 지진
2019센리남지구센터 정비 완료
인구10만 명 이상 증가
2020센리뉴타운 개발사업・센리중앙지구센터 오픈・오사카 엑스포・기타오사카급행전철 개통50주년
오사카 모노레일 개통30주년
2022센리뉴타운 오픈 60주년
마치나카리빙키타센리오픈

사진제공:오사카부、스이타시립박물관、쑤이타시립박물관、천리시민포럼、한큐코퍼레이션、赤井直(아카이 스나오)、飯島ユキ子(이이지마 유키코)、産木民彦(우부키 타미히코)、奥居武(오쿠이 타케시)、北田順三(기타다 준조)、田畑千鶴(타바타 치즈루)、永井俊雄(나가이 토시오)、松浦弘昌(마쓰우라 히로마사)

지도

남지구(스이타시)

1. 남지구센터

한큐전철 미나미센리역(1963년 개설)을 중심으로 한 지구센터. 센리뉴타운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으로 1970년 중앙지구센터가 생길 때까지 뉴타운의 출입구로 기능하였습니다. 2000년경부터 재정비가 진행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지도) (->사진)

4. 센리뉴타운플라자

뉴타운 내 스이타시 구역의 행정기능이 집약되어 있으며, 2층에는 센리뉴타운의 자료를 모아 놓은 「센리뉴타운정보관」이 있습니다. 시민활동의 거점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지도) (->사진)

A. 津雲台(쓰쿠모다이)

1963년 입주 개시. 남지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지구센터와 센리미나미공원이 있습니다. 북쪽 나나초메에는 각종 서비스시설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도) (->사진)

B. 高野台(다카노다이)

1963년 입주 개시. 사타케다이에 이어 2번째로 오래된 주구. 주변녹지의 일부인 다카마치 연못에는 5월말이 되면 반딧불이 날아다닙니다. (->지도) (->사진)

C. 佐竹台(사타케다이)

1962년 입주 개시. 센리뉴타운에서 가장 먼저 주민 입주가 시작된 주구. 일본 뉴타운의 개척지라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재건축을 비롯한 재생활동이 조기에 진행되었습니다. (->지도) (->사진)

D. 桃山台(모모야마다이)

1967년 입주 개시. 죽순과 함께 과거 센리구릉지의 대표적 산물이었던 복숭아의 이름을 딴 지명입니다. 센리뉴타운에서도 오사카 시내로의 접근성이 가장 좋은 곳입니다. (->지도) (->사진)

E. 竹見台(다케미다이)

1967년 입주 개시. 12개 주구 중에 가장 적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만, 미나미센리역에 인접한 스타하우스는 상공에서 볼 때 별 모양으로 나타나는 고층 건축물로서 센리뉴타운을 대표하는 경관으로, 이미지를 이어받은 재건축이 진행중에 있습니다. (->지도) (->사진)

북지구(스이타시)

2. 북지구센터

한큐전철 기타센리역(1967년 개설)을 중심으로 한 지구센터. 오사카대학 캠퍼스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학생들의 이용이 많은 곳일 뿐만 아니라 미노시 동부지역 주민들도 많이 이용하는 곳입니다. (->지도) (->사진)

F. 青山台(아오야마다이)

1965년 입주 개시. 센리뉴타운 내에서도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전망 좋은 곳이 많습니다. 기타센리역에서 북쪽 경사면으로 펼쳐진 단지 경관은 압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도) (->사진)

G. 藤白台(후지시로다이)

1964년 입주 개시.넓은 센리기타공원을 포함하여 오사카대학의 캠퍼스 및 만국박람회공원도 인접하고 있습니다. 국립순환기병원연구센터가 철거된 후 남아 있는 빈터에는 대규모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도) (->사진)

H. 古江台(후루에다이)

1964년 입주 개시. 센리뉴타운에서 유일하게 개발전에 10호가 채 되지 않았던 오랜 마을이 신사와 함께 남아 있습니다. 북지구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주구입니다. (->지도) (->사진)

중앙지구(도요나카시)

3. 중앙지구센터

기타오사카급행전철 센리추오역(1970년 개설)을 중심으로 한 지구센터. 센리뉴타운에서 가장 큰 지구센터입니다. 뉴타운 구역을 넘어 북부 오사카의 신도심으로서 뉴타운 외부에서도 많은 이용자가 왕래하고 있습니다. 신미도스지 도로의 서측에는 업무용 빌딩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지도) (->사진)

5. 센리문화센터「코라보」

뉴타운 내 도요나카시 구역의 행정기능이 집약되어 있으며, 4층의 도요나카시립도서관에는 센리뉴타운에 관한 자료들이 모여 있습니다. 시민활동의 거점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지도) (->사진)

6. 上新田(가미신덴)

에도시대 초기에 형성된 마을로서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뉴타운 개발 당시 주위의 전답과 산림만 매수되어 마을의 전통적 가옥 경관이 미래도시의 한가운데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후 민간개발업자가 건설한 맨션이 다수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지도) (->사진)

I. 新千里北町(신센리기타마치)

1966년 입주 개시. 뉴타운 내 도요나카시 구역 중에서 최초로 개발된 곳입니다. 센리뉴타운의 최고점이 여기에 위치하고 있으며, 뉴타운 북부로의 배수의 거점이기도 합니다. (->지도) (->사진)

J. 新千里東町(신센리히가시마치)

1966년 입주 개시. 12개 주구 중에 유일하게 모든 주택이 아파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센리추오의 신미도스티동촉으로부터 센리추오공원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센리히가시마치공원에는 울창한 죽림도 남아 있어서, 주민들의 손에 의해 관리되고 있습니다. (->지도) (->사진)

K. 新千里西町(신센리니시마치)

1968년 입주 개시. 중앙지구센터의 서쪽 부분을 포함하여 센리뉴타운에서는 드물게 업무 지구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집합주택의 재건축이 이른시기에 진행되었습니다. (->지도) (->사진)

L. 新千里南町(신센리미나미마치)

1968년 입주 개시. 센리뉴타운에서 가장 늦게 개발된 주구입니다. 오사카 도심과 센리뉴타운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인 신미도스지의 서쪽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지역입니다. (->지도) (->사진)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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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s-1970s

촬영:*産木民彦(우부키 다미히코)、●赤井直(아카이 스나오)、+永井俊雄(나카이 도시오)

2000s-2010s

촬영:×奥居武(오쿠이 다케시)、◎田中康裕(다나카 야스히로)(천리 뉴 타운 연구 정보 센터)

자료

개발기에 오사카부나 그 관련단체 등이 제작한 팜플렛 등은 사용허가를 얻어 수록하고 있습니다.(각 표지를 클릭하면 PDF형식으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무단사용금지